경도된 시야·독단서 벗어나 현장감 살리고 지평 넓혀 입체화 하자![연구세미나88]
제88회 개화기 서양인이 본 조선의 풍경
모든 역사는 뒤엉켜 있다, 그렇기에 칸이 막혀 있는 개별 학문의 잣대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문학-사회과학 등의 융합-교류를 통한 통섭적, 다층적, 종합적 시선으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새삼스럽지만 매우 중요한 과제가 제시됐다. 한국주민자치학회의 제88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가 ‘개화기 서양인이 본 조선의 풍경’을 주제로 25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에서 열렸다.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 명예교수)이 좌장을 맡은 이날 세미나에서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발표를,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와 이영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지정토론에 참여했다.
발제를 맡은 신복룡 교수는 1980년대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시절에 개항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의 견문기를 수집했고 이 책들은 <한말 외국인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총 23권이 번역되어 출간됐다. 2002년에는 이 방대한 내용이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선보이기도 했다.
‘정치학을 모르는 역사학은 열매가 없고 역사학을 모르는 정치학은 뿌리가 없다’
이날 발표 서두에 신복룡 교수는 ‘나는 왜 이 작업에 몰두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외눈박이 역사학으로부터의 해방 △자료 혼자 보기의 위험 △지평의 확대 △현장감 △역사의 입체화 등을 언급했다. 특히 ‘정치학을 모르는 역사학은 열매가 없고, 역사학을 모르는 정치학은 뿌리가 없다’고 한 J. R 실리(Seeley)의 지적도 강조했다.
그는 또 ‘번역자로서의 경험과 당부’로 ‘(1)번역에는 국어학의 실력이 외국어보다 먼저이다 (2)번역자는 필자가 글을 쓰며 토씨 하나에도 고민했던 점을 잊지 말고 원문을 완역(完譯)해야 한다 (3)번역자의 불필요한 의견을 첨가하지 않는다 (4)각주(脚註)를 달아야 한다 (5)문장은 췌사(贅辭, 군더더기 말)와 부사를 줄여야 한다 (6)원작자의 오류는 누구의 책임인가? 번역자 책임이다 (7)문법은 맞고 내용은 틀리는 경우도 번역자 책임이다 (8)AI번역기는 참고용일 뿐이며 사람 냄새(human scent)가 없으니 최소화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다음으로 신 교수는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왜 조선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해 ‘서부 개척의 여진’ ‘네덜란드-포르투갈-스페인들이이 앵글로색슨계에 밀리고 특히 미국이 강세를 보임’ ‘19세기 말 축적 자본의 투자 문제 등장’ ‘고립주의 외교 정책의 결함에 직면’ ‘조난자의 박해 중지’ ‘항해 중 식수나 식량 등 보급을 위한 기항지’로서의 의미를 제시했다. 또 소위 ‘은자(隱者)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심, ‘골드러시’와 ‘서진운동’, 남북전쟁 종식으로 인한 귀향 군인들의 생업 어려움과 삶의 무료함, 한국 물산에 대한 과장된 소문(조선은 동방의 엘도라도) 등도 요인으로 꼽혔다.
발제자의 오페르트(Ernst J. Oppert)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그에 따르면 ‘도굴범’으로만 알려진 오페르트는 프러시아 출신의 유태 상인으로 동양인에 대한 인류학적 지식으로 ‘조선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라는 점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선교사들에 대해 ‘복음 전파라는 이름의 백색우월주의’ 차원이 있었음도 지적됐다. 이에 대해 신복룡 교수는 ‘서구중심주의 교리 앞에서 한국 교회의 토착화는 요원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1)조상 숭배의 의례에 대해서는 좀 더 너그러울 수 없는가? (2)구정 명절에 조상을 추모하는 합동 예배를 드리면 안 되나? (3)추수감사절을 추석에 지내면 안 되나? (4)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하고 기념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 (5)신구교 공동의 한글 성서 번역은 왜 배척해야 하나?’라는 도전적인 의문도 제기했다.
그런 면에서 “알렌은 선교사로는 사실상 한국에서 실패한 셈이지만 포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한국의 무속을 야만시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서 기독교 포교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문제가 있다’고 했으며 의학, 교육, 자연과학에 기여했다”는 신복룡 교수의 평가는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서방세계에서 조선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발제에 따르면 레르시아(이란)인인 코르다드베(Ibn Khordadbeh: 820–912)로 대상(隊商)들의 얘기를 듣고 중국사를 쓰면서 조선에 관한 얘기를 언급했다.
‘바다를 버려 나라를 잃었다’
계속해서 ‘서양인이 본 조선의 정치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신 교수는 “학정, 가렴주구, 강제노역, 조세수탈이라는 인식, 특히 한국을 네 차례 여행하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여류문필가 비숍은 갑오동학혁명을 ‘무장한 개혁자들의 봉기’라고 보았다. <한말 외국인 기록> 23권 중 유일하게 한국을 방문하지 않고 책을 쓴 그리피스(W. E. Griffis)도 당쟁에 대해 썼지만 이를 한국만이 가진 정치적 해악이라고 표현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의 인종과 성정에 대해 발제자는 “새비지-랜도어(A. H. Savage-Landor)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는 ‘단일 민족이라는 순혈주의’를 한국인의 신화라고 보았다. 한국인의 성정에 대해 비숍은 ‘불결하고 사치하고 게으르다’라며 1890년대 단양의 어느 토호 아내의 사치스런 치장과 가구들을 언급하며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시간이 흘러 러시아와 만주 한인촌을 방문한 후 ‘한국인은 게으르거나 불결 또는 사치하지 않다’고 했으며 근면해도 가렴주구로 인해 가난을 면할 수 없다는 체념으로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면서 ‘조선 사람들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특히 여성의 모습을 통한 사회적 습속에 대한 묘사도 눈길을 끈다. 서양인들에게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한국 여성들의 한이 보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 사람은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는 문구도 쓰였다. 반면 <서울풍물지>의 저자 길모어(G. W. Gilmore) “전통 가문의 여성은 결코 하대 받지 않았으며 존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라고 해 눈길을 끌었다.
신복룡 교수는 “세계사적으로 보면 유제품을 많이 먹는 민족들이 강대했는데 조선은 유제품을 먹지 않는 민족이었다. 이는 한국인의 체질과도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신 교수는 “‘대외적으로 바다를 버려 나라를 잃었다‘는 지적이 있다. ’바다를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들에겐 ’공수증(恐水症, hydrophobia)‘이 있다. 왜구와 양이(洋夷)에 대한 공포가 해안의 황폐화와 소개(疏開)를 불러왔다. ’8월에 물가에 가지 말라‘ 토정비결의 흔한 경고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신복룡 교수는 ‘망국의 순간에 한국 교회는 왜 그리 침묵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게일(James S. Gale) 목사의 <전환기의 조선>(1909)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 저항하지 마라.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목사의 설교에 교인들은 무심히 앉아 멸망한 조국이 개가 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교토(京都)의 신라 신사(神社)에 걸린 발원문(發願文) ‘아침에 눈 뜨면 희망에 부풀고 낮이면 땀 흘려 일하고 밤이면 감사하며 잠들게 하소서’를 언급하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비판적 읽기의 중요성: 서양인들의 한국 관계 저서는 한 권만 읽어선 안 된다
좌장을 맡은 박경하 교수는 “여러 분야에 대한 다양한 관심으로 자세한 사례를 매우 흥미롭게 소개해 주셨다. 조선의 망국 원인으로 해양 정책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점, 당시 기독교인들이 망국 상황에서 일본의 폭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대목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고 짚었다.
다음으로 지정토론에 나선 이영미 인하대 연구교수는 “발표자는 1970년대부터 서양인들이 남긴 한국 관계 저서 수십 권을 번역 출판하여 학계와 대중에 알렸다. 이미 알려진 책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책까지 수십 권을 번역 출판하였고 이는 여러 연구자, 번역가, 출판사의 관심을 일으켜 수많은 저서, 번역서, 연구 논문의 생산으로 이어졌다”라며 “서양인들의 한국 관계 저서는 비판적 읽기가 요구되는 자료이자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되는 자료이다. 한국에 관한 글을 쓴 사람들은 시대적으로는 17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있었고, 출신 배경, 사회경제적 지위, 교육 수준, 심지어는 한국에서의 경험 정도도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당시 서양인들이 공유한 한국 인식을 파악하려면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상당한 분량의 기록을 두루 비교해야 하고 그들의 개인별 한국 인식을 이해하려면 저자와 그(녀)가 살았던 시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교수는 “서양인들의 한국 관계 저서 중 은자의 나라 한국은 1882년 출간 이래 약 30년간 한국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입문서로 기능했다. 그리피스는 한국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양인들이 생산한 한국 관련 문헌에 의존하여 이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내용이 가장 자세했던 한국교회사 서론을 많이 가져다 썼다. 이 서론은 그리피스가 많은 부분을 가져다 썼을 만큼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지만 순교자들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본능과 쾌락을 추구하는 민족, 먹고 마시는 데 몰두하고 성욕만 알지 사랑은 모르는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그리피스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이상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가 수용한 프랑스인들의 부정적인 한국 담론은 향후 수십 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1880)에 포함된 인류학적 지식은 오페르트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형제들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율리우스(Julius Oppert, 1825~1905)는 1869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아시리아 언어 및 고고학 담당 교수로, 구스타프(Gustav S. Oppert, 1836~1908)는 1872~1893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산스크리트어 교수로 재직했다. 반면 오페르트는 1851년 홍콩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이래 계속 상인으로 살았고 귀국한 후에도 아시아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쌓기보다는 사업가로 지냈다”고 의문을 표했다.
다음으로 이영미 교수는 “그리피스의 당쟁 관련 기록은 다른 많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S. Gale, 1863~1937)에 관한 부분에서 선교사들이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한국인들의 어떤 측면을 비난하였다고 해서 그들을 백인우월주의자들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게일이 한국의 문화와 학문을 열심히 배우고 <구운몽>과 같은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백인우월주의는 선교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밝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려운 정신이었던 것 같다. 선교사들은 아주 강고한 백인우월주의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백인이 아닌 사람들도 진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비서구 세계에서 그들과 함께하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역사는 뒤엉켜있다…서양사-동영사-한국사 ‘따로 읽기’ ‘학문 벽 쌓기’ 매우 위험
두 번째 지정토론자인 육영수 중앙대 교수는 “오늘 신복룡 교수님께서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교류, 역사학-정치학의 문제의식에 대해 잘 말씀해주신 것 같다. 저는 서양사 전공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가 다 따로 놀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구분은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사도 동서양사의 시각으로 같이 보지 않으면 소위 ‘국뽕’이 심각할 수 있다. 보편타당 여부는 당대 세계사의 관점 속에서 비교되어야 한다. 모든 역사는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가 고립되어 민족주의 지향적 역사가 된다면 많은 사료들이 퇴보될 수밖에 없다”라며 “한국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국의 민속은 다른 동양국의 민속과 어떻게 다른가 등이 오늘날 한국학의 질문이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우리보다 외국학자들이 더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육영수 교수는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따로 쓰기, 학문 벽 쌓기 등은 굉장히 위험하며 이런 식으로는 엉켜있는 한국사를 풀어낼 수가 없다. 꼭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다. 저 같은 질문을 던지는 학자, 연구소들이 늘어가고 있어 다행”이라고 밝혔다.
신복룡 교수는 “나는 파이오니아로서 시대를 조금 앞서가는 사람일 수는 있으나 파이오니어가 겪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후학들이 저를 밟고 올라가셔야 한다. 정치학과, 역사학과에서도 다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교실 맨 뒤에 앉아 있는 아이의 심정으로 살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사학 쪽에서 그나마 저를 그렇게 박절하게 대하진 않으셨다(웃음)”라며 “번역서를 가장 많이 낸 정치학자이나 지금도 자신 없는 건 지명이다. 한국의 지명을 중국어로 써서 일본어로 읽어 영어로 번역해 놓은 식이라 지명이 특히 힘들었고 번역에 1년이 걸렸다면 주석에 또 1년이 걸렸다. 이런 것들을 앞으로 후학들이 뒷감당을 해줬으면 한다. 내가 하기에는 이제 낼모레 90이라 시간이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또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충격적 순간, 문득 깨달음이 찾아온 순간은 영국의 고전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에서 ‘역사학자의 첫 미덕은 모르고 시작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다. 색깔이 좋으려면 백지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미 바탕색이 칠해져 있는 상태의 그림이면 훌륭하기 어렵다. 오염되지 않은 사관으로 즉 자신의 눈으로 역사를 보라,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런 차원에서 춘추사관, 이런 것보다 서양인들이 백지상태에서 본 첫 인상, 그게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부패도 진화한다’라는 말이, 세상에 좋은 것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장도 진화한다는 말에 순간 ‘아 내가 헛살았구나’라는 충격이 왔다”고도 밝혔다.
신 교수는 ‘지방자치가 엉망인 이유’에 대해서는 “지방의원을 의원직을 생계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국 젠트리의 첫 조건은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서점 주인의 70%는 서점 수익으로 먹고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미국의 힘이다. 한국 지방자치가 제대로 되려면 의원들을 무봉급제로 해야 한다. 지방자치 의원이 생계수단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산 60년이 평범한 국가에서 300년 산 시간과 같다. 그만큼 우리는 늘 급발진 했으며 삶에 여유가 없었다. 야생마를 타고 300년 걸릴 걸 60년 만에 해냈다. 제대로 한 번 쉬지도 못하고 영혼이 몸의 속도를 못 따라온 것이다. 이건 누구의 책임일까? 교육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교육이 다시 서야 희망이 있지 않을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이기도 하다. 가정과 교육이 다시 섰을 때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문효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