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김학홍 기획단장이 7월 말 한국지역언론인클럽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목표로 제시한 윤석열 정부는 민선 8기 지방자치 체제에서 중앙과 지방정부의 수평적 협력관계에 기반한 거버넌스를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 주민참여권 향상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주민자치회 개선을 위한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해 빈축을 사고 있다.
아직도 부재 상태인 尹정부 주민자치 정책
김학홍 단장은 인터뷰에서 ▲재정분권 ▲지방자치와 교육자치의 연계 ▲주민 중심의 자치를 강조하며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 중심으로 권한이 내려가다 보니 주민의 체감도가 낮은 것이라고 분석하며 지방이양사업을 발굴하고 자치조직권, 행정입법권, 재정권 등을 확대하는 가운데 생활 속 자치를 찾아 주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단장의 말에 따르면 결국 현재의 지방자치는 단체자치 중심으로 치우쳐 있으며, 상대적으로 주민자치에 대한 정책 마련과 제반 지원이 부족한 점을 인정한 셈이다.
윤석열 정부는 6개 국정목표와 110대 국정과제에서 지역활성화와 관련된 6번째 국정목표로 지역균형발전 15개 국정과제와 더불어 ‘주민자치위원회 및 주민자치회 개선’ 등 76개 실천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주민자치회 및 주민자치위원회 개선 방안’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은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다.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와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통합을 앞둔 시점에서 ‘주민자치회 및 주민자치위원회 개선 방안’의 정책을 제시할 주체가 모호한 상태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 자치분권을 수차례 강조해 온 정부가 위원회 통폐합 기조에 휘말려 제대로 된 주민자치 정책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월 중순경 자치분권위와 균형발전위의 통합 윤곽이 나올 것이라는 김 단장의 언급을 미루어 볼 때 ‘주민자치회 및 주민자치위원회 개선 방안’ 역시 이 시기 이후에나 드러나지 않을까 막연한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국민 10명 중 9명 자치분권 필요성 인식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발표된 ‘자치분권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방자치법 전부개정법률안이 전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자치분권위원회와 한국갤럽이 전국 만 18세 이상 1,200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8.4%가 자치분권을 인지했고, 86.7%는 자치분권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자치분권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활동 분야 순위에서는 주민투표(29.7%), 주민반상회(23.4%)가 우선인데 반해 주민자치회(10.5%)와 주민총회(6.15%)는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을 보였다.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에 주민자치회 조항이 모두 삭제된 바 있고, 주민 주도로 주민자치회를 구성, 운영할 수 있는 주민자치회법(안)이 통과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자치에 대한 인지도는 아직도 낮은 수치인 것으로 분석된다.
고무적인 것은 지방자치 활동 참여자 3명 중 2명(66.9%)은 ‘본인의 활동이 지방자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라고 생각했으며 3명 중 2명(65.9%)은 ‘지방자치 활동에 참여 의향이 있다’라고 밝힌 결과를 놓고 볼 때 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참여 동기가 높다고 파악된다는 점이다.
중간지원조직 허명 아래 시민단체가 주민자치회 지배
한편, 한국주민자치중앙회는 새 정부 출범 전인 지난 4월, 당시 김병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을 만나 ▲통리-읍면동 주민자치회 이중설계 ▲시민단체를 배제한 지역특화형 주민자치회 모델 개발 ▲전국 단위의 주민자치회 상급단체 조직화 등을 윤석열 정부의 주민자치 국정과제로 주문한 바 있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 전상직 대표회장은 “이전 정부의 주민자치 정책은 공백 상태였다”라고 못 박으며 “문재인 정부의 주민자치는 시민단체가 중간지원조직이라는 이름을 걸고 주민자치회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상급기관이 되어 버렸다”라고 비판했다.
실제 서울형 주민자치는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구 마을자치센터-동 자치지원관 구도의 수직체계를 구축, 주민자치회를 가장 말단에 놓아 버렸다. 특히 행전안전부의 주민자치회 시범실시를 전국화시켜 시범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만큼 1,200여 개 읍면동에서 기존 주민자치위원회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분석이 부재된 채 주민 동의 없이 무차별 시행 중이다.
시민단체 배제한 지역특화형 주민자치회 모델 필요
이에 대해 전상직 회장은 “2015년부터 시작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실시한 주민자치 모델(볼리바리안 주민자치회)을 모방해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의 카르텔로 주민자치회를 장악했다”고 지적하며 “덩달아 더불어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은 주민자치회 설치 및 운영을 시민단체에 포괄적으로 위탁했고 이를 통해 시민단체들은 시군구에 확실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주민자치회를 근거로 읍면동에도 대대적으로 거점을 구축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전 회장은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시민단체를 시범실시에서 완전히 배제시킨 후 각 지역별 특성에 맞는 주민자치회 모델을 개발 및 적용, 2년간의 시범실시를 거쳐 가장 적확한 주민자치회 모델을 제도적으로 확립할 것을 제안했다.
주민자주형 모델이 대안될 수 있어
특히, 주민자주형(주민총회형) 모델이 새로운 주민자치회의 구조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주민이 자주적 의지로 자치회를 구성하고 자치회 총회를 통해 마을을 민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주민자주형 모델은 주민이 자치회를 이끌 회장과 임원을 직접 선출하며, 자치회 전체를 규율하는 정관을 제정하는 한편, 그 정관을 실행하는 사무조직을 운영하고, 주민들이 주민자치세를 납부해 자치회를 스스로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주민자치회에 인사·입법·재정권이 보장되는 것이다.
주민자주형 모델 도입 단위에 있어서는 통리가 적합하다. 선진국 주민자치기구의 설치 단위를 살펴보면 영국 패리시는 1,000명 이하, 일본 자치회는 50~200세대 이하, 미국 커뮤니티협의회는 200여 명 이하 등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주민자치회의 설치 단위 역시 현재의 읍면동이 아니라 통리가 합당하다는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럴 경우 주민자치회를 통리자치회와 읍면동자치회로 구분해 각각 자치와 협치로 운영하는 방안이 가능해 진다. 읍면동 주민자치회는 무보수 명예직인 자치회에게 인구나 면적에서 감당하기 힘들다. 따라서 행정보조기능만 있는 현재의 통리 주민자치회를 조직화해 통리는 자치 중심으로, 읍면동은 협치 중심으로 설계하는 이중적 구조가 적합한 것이다.
협력형 주민자치회는 명백히 실패한 모델
지난 2012년 지방행정체제 개편추진위원회에서 주민자치회 시범실시 모델로 협력형을 도입한 바 있다. 그러나 역할에 합당한 주민자치회의 위상과 권한 부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제도적 장치 또한 부재했다. 읍면동장과 대등한 위치에서 행정업무를 협의해 처리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지게끔 규정된 모델이 협력형이지만 실제는 읍면동장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이 주민자치회에 전혀 부여되지 않았다. 오히려 읍면동장 밑에 위치하는 주민자치회로 전락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민자치회의 최고의결기관인 주민자치회 총회의 권한과 기능도 배제되어 있다.
협력형 모델은 주민자치회가 읍면동을 심의하는, 다시 말해 지방의회 역할을 담당하는 기초정부 모델이다. 따라서 읍면동 자체를 지방정부화 시키는 것이 필수다. 그러나 인사·입법·재정권 등 일체의 권한이 없는 주민자치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협력형 주민자치회는 애시 당초 실현성이 없는 모델이었던 것이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협력형 모델은 행정의 개입이 많아 자치가 아닌 관치로 일관되는 경향이 컸고 이는 10년 가까이 유례없는 주민자치회 시범실시로 이어지고 있다”라며 “무엇보다 협력형은 주민총회의 실질적 권한이 빠져 있다. 주민 스스로 주민자치회와 자치회의 최고의결기관인 총회를 통해 자치할 수 있는 주민자주형 모델 도입을 검토할 때”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회 충돌은 필연적
한편,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월간 <자치발전> 6월호에 게재한 ‘꼭 알아야 할 지방자치 정책 Brief’에서 “윤석열 정부는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회의 상호보완적이며 선순환 관계를 고려하는 취지로 두 정책을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마을자치 활성화와 같은 통합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주민자치회와 마을공동체 간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민자치회는 현행 지방자치분권 및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된 주민자치조직이다. 반면, 마을공동체는 지역 및 사회단체, 관변단체, 비영리단체(NPO), 비정부단체(NGO) 등이 참여하는 결사체다. 따라서 해당 지역이나 마을과 관계없는 조직도 대거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태생적으로 마을공동체는 사업의 기획 및 실행 자체가 목표인 조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실행하는 사업은 영리나 이권사업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런 목적이라면 마을공동체에서 주민자치회를 흡수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다. 주민자치회의 설치 및 운영을 중간지원조직 형태인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등에 위탁하는 제도적 규정도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이에 대해 전상직 회장은 “마을공동체사업에는 시민운동가, 활동가들이 공동체를 빙자해 시민운동을 하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공동체에 대한 정의, 철학, 사회적 의미, 인간에 대한 성찰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라며 “결국 시민운동의 도구 수준에 머무는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사업으로 주민자치회를 접수하겠다는 속내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주민자치 정책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후보 당시 정책 공약에서 제외된 바 있으며, 새 정부 출범 후에도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다. 주민자치에 대한 대대적인 정책 마련과 지원 등 개선안 마련이 시급한 가운데 정부가 내놓을 해법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