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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지식 생산을 위한 숙의형 주민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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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지식 생산을 위한 숙의형 주민자치
  • 조승희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 승인 2024.08.05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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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 제주에서 한 숙의형 정책 개발요청이 기각되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폐교된 옛 탐라대학교 부지를 우주산업 실증을 위해 활용하려는 제주도의 계획에 제주 녹색당과 정의당 제주도당이 숙의 공론화를 요구했지만 이에 제주도가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숙의 공론화란,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꽤 기본적인 요청이다. 제주에서 우주산업 개발을 하는 것의 정당성이나 실효성을 떠나서 숙의 공론화 요청을 거절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 전인 2019년 여름, 제주도에서는 반년 동안이나 숙의형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실행한 적이 있었다. 제주에서 2012년부터 추진해 온 에너지 전환 계획인 제주 카본프리 아일랜드 2030’ 계획을 근간으로 하여 제주도 제6차 지역에너지계획의 방향을 함께 고민할 시민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지역에너지계획은 아예 원칙적으로 시민참여를 정책 결정 과정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래서인지 지방 정부마다 숙의 방식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나왔다. 게다가 2017년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로 인해 숙의형 시민참여에 대한 국가적, 대중적 관심이 높아져 있을 때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때보다도 더 나은 숙의형 정책 참여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제주 지역에너지계획에 담겼다.

제주도가 숙의 및 토론 기간을 약 6개월 정도의 기간으로 기획한 것도 3개월의 숙의와 3일의 오프라인 토론을 했던 신고리 5.6호기 사례보다 더 길게 토론하는 것이 더 질 높은 숙의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숙의형 정책 참여 방식에 대한 여러 비판도 있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때도, 민주적 참여를 명목으로 국가가 시민에게 원전 개발 결정의 책임을 전가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미 정책이 상당 부분 결정된 상황에서 숙의 공론화를 진행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아쉬움을 남겼던 이유를 숙의를 더 잘하지 못해서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의를 더 많이, 더 완벽하게 한다고 해서 정책 결정 과정이 더 민주적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무조건 모든 정책에 무조건 숙의 참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리가 있다. 결국 중요하게 물어야 할 것은 정책에 숙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2019년 제주도 시민 참여 프로그램에서 한국 시민참여 방법이 얻을 수 있는 교훈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앞으로 어떤 시도가 가능할지 논의하고자 한다.

 

사진=제주도청 홈페이지 캡처
사진=제주도청 홈페이지 캡처

 

시민연구단의 모범적인 숙의 방법

2019년 여름, 제주 카본프리 아일랜드 정책에 관해 박사 학위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필자는 지역에너지계획의 기획 및 집필진으로 초대받아 시민 정책 참여 프로그램의 참여연구원이 되었다. 제주 에너지공사에서 모집 공고를 낸 이후 약 20명의 도민이 모집되었다. 참여한 도민들은 두 개의 조로 나뉘어 반년간 조를 바꾸지 않고 토론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을 소비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제주 도청 관계자다, 내가 도지사다하고 참여하셔야 합니다.”

프로그램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전문가가 설명했다. 이 전문가의 설명은 시민 정책 참여 현장에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시민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시민 참여 프로그램과 같은 경로로 정책 결정에 참여하게 된 시민은 주어진 정책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에 대해 발언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신이 시장이나 도지사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책을 비평해야 하며 어떤 정책이 새로 필요한지, 또는 기존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이처럼 숙의형 정책 참여는 정책의 개요를 짜는 일부터 실제 정책 보고서에 들어갈 말을 결정하는 일까지 꽤 적극적인 권력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민연구단이라는 키워드는 참여 시민의 정체성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지역에너지정책 기획단은 시민을 단지 수동적인 정책 수혜자로 보지 않고 적극적인 행위자 및 결정자로 정의하기 위해 모집하는 시민 그룹을 시민연구단으로 명명했다. 서로에 대한 호칭도 “OO , OO 사장님등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 호칭이 아닌 “OO 연구원님으로 통일했다. “연구원님이라는 호칭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문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여 참여 시민부터 전문가까지 모든 사람이 서로를 연구원님으로 불렀다.

또한 에너지 정책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나 사업자, 사업 관계자, 또는 특정 종교/정치집단에 속한 도민은 최대한 배제하였다. 에너지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최대한 줄이고, 오롯이 정책 결정자로 시민의 정체성을 정의한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당시 이러한 설명을 듣고는 자신에게 너무 막중한 책임을 준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래서 토론과 의견 개진 방법을 알려주는 전문 퍼실리테이터가 고용되어 전 과정에 도입됐다. 퍼실리테이터는 말 그대로 토론을 중재하는 사람이지만 시민이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기초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역할을 제공했다. 옆 사람과의 서먹함을 깨는 아이스 브레이킹부터 새로운 의견을 내는 브레인스토밍,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을 때 경청하는 법, 그리고 의견이 분분한 지점에서 합의점을 끌어내는 다양한 방법까지 토론의 전 과정에서 시민이 가져야 할 자세와 해야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토론 시간에 시민 연구원들이 의견을 내는 법 또한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접착식 메모지(포스트잇)에 자기 생각을 적는 것이었다. 포스트잇을 통해야만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다소 제약적인 행위는 시민 간의 발언에 경중을 균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어느 한 명에게만 여론이 쏠리거나 특정 인원이 말을 너무 길게 하는 것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 과정에서 시민 연구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포스트잇과 씨름하며 보냈다. , 시민들이 작성한 메모지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퍼실리테이터가 맡았다.

토론 시간에 전문가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전문가가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여 시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듯이 논의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치 학교 수업 시간에 학생이 모르는 문제를 만났을 때 손을 들고 선생님을 부르듯 시민들이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의견을 내는 동안 어느 시민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할 때만 가서 그 부분에 대한 설명만 제공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토론 과정을 거쳐서 나온 내용은 실제로 지역에너지계획 보고서에 실렸다. 지역에너지계획의 목차도 시민들이 숙의 프로그램 첫날 메모지와 투표를 통해 직접 정한 것이었다. 풍력발전기가 대형이 좋은지 소형이 좋은지, 태양광 발전은 어떤 장소에 의무화할 것인지, 대중교통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이 보고서 본문에 모두 실렸다. 참여한 도민 전원의 이름도 보고서 저자 명단에 실렸으며 상세한 논의 기록도 부록에 포함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사진=필자 제공

 

더 나은 숙의 방법 찾기보다 공동 지식 생산을!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민연구원들은 최대한 전문가가 가르쳐준 대로 쓰지 않고 자신이 사는 동네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의견을 내지 않으며 함께 반년간 토론하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며 보고서에 올릴 내용을 정했다. 하지만 이렇게 객관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차와 제안된 내용 중에는 전문가가 아니면 생각해 내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어쩔 수 없이 많이 담겼다. 아무리 전문가가 중간중간 최소한으로 개입하려 했어도 참여 시민들 중 전문가와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의견을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참여 프로그램이 아직 진행 중이던 201910, 한 시민연구원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에너지계획 안에 있는 내용들이 다시 시민들 입으로 나온다. 그게 문제라고 본다. 새로운 게 나와야 하는데”. 이 시민은 시민연구단이 정책 용어를 사용해 가며 토론하는 것을 아쉽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지역에 대한 지식보다는 기존에 있는 에너지정책에 관한 논의만이 우선되다 보니 지역 주민만이 낼 수 있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19년에 진행한 제주 시민참여 프로그램은 최대한 이상적인 숙의 참여 형태를 이루고자 했지만 오히려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이나 지식이 토론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참여자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책 참여에서 더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내기 위해 시민은 이상적인 지식 학습자를 넘어 지식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이때 지식은 정책 지식보다는 지역과 마을에 관한 아주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지식이어야 한다. 해당 지역에는 어떤 자연환경이나 기반 시설이 존재하는지, 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역사는 무엇인지, 마을이 관리하는 공동자원에는 무엇이 있는지, 지역 주민이 정책 전문가를 가르쳐야 한다. 전문가-비전문가(시민)의 구도가 아니라 같은 전문가-전문가로서 상호 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히려 위 인터뷰에서 시민이 이야기한 것처럼 철저히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숙의 방식에 새로운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숙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스스로 정책 지식을 학습해서 정책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시민과 정책 전문가가 공동의 지식을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고로 더 모범적으로 공부하며 더 오랫동안 토론하려는 시민보다는, 정책 결정자가 알아야 할 지역 지식의 전달자가 될 시민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앞으로 시민이 할 과제가 잔뜩 쌓여있는데도 코로나 이후 전문가가 마이크를 들고 일방적인 강연을 마친 후 남은 시간에 시민들의 코멘트를 듣거나 더 심하게는 찬성/반대 이상으로 의견을 내기 어려운 현장으로 회귀하게 된 것은 아쉽다. 이것마저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거절하는 일은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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