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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에 생각하는 아렌트의 자유와 주민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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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에 생각하는 아렌트의 자유와 주민자치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4.08.13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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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815. 올해도 어김없이 광복절을 기념하고 있다. 광복이란 일제의 폭압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사건을 뜻한다. 힘에 밀려 국권을 강탈당한 민족적 수치이자 이를 되찾은 기쁨이기도 할 것이다. 자의(字意)가 가리키듯 광복이란 관념은 1910년 강제적인 국권수탈에서부터 1945년 일본 패망까지의 식민지화 과정이라는 민족적 모순에 대한 반제(反題)로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의적 의미를 떠나 광복이란 말은 국권회복,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치열한 투쟁을 포괄하는 고유한 관념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복절에 떠올리는 아렌트의 자유

광복이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란 의미이다. 빛은 어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빛과 어둠은 이항대립의 개념이며 실존철학적 관점에서는 낱개의 말(Einzelworte)이 아닌 짝 말(Wortpaare)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만으로, 혹은 어둠그 자체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순차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그 둘이 교집합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삶은 참으로 신비스럽다. 8.15의 의미에서 볼 때 을 되찾는[光復] 것은 곧 자유를 되찾는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다. 일제 35년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아니 인류 역사 자체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획득한 자유에 발을 딛고 우리의 삶은 이어지고 있지만 피로써 되찾은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는 노력은 바쁜 일상에 파묻혀 버리고 있다. 그 결과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짓밟는 말과 행태가 정치와 종교, 교육현장은 물론 사회 곳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자유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차라리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8.15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자유란 무엇인가? 흔히 생각하듯 자유는 그저 타자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이란 의미일 뿐인가?

이러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자유에 대한 독창적 사유를 제공한 한나 아렌트(Arendt)의 사상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물론 아렌트는 자유의 개념을 정치적 현상으로 이해하기에 그녀의 자유는 정치와 자유의 관계, 서구 혁명 역사의 분석, 고대 폴리스의 자유 등과 관련지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는 나 자신과의 교류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교류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라는 아렌트의 실존적 자유와 삶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 보도록 한다.

아렌트는 해방과 자유를 구분한다. 해방은 자유를 위한 전제지만 자유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해방이 되었다고 자유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렌트의 자유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소극적 자유 이상의 무언가를 가리킨다. 우리의 사유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자유의 본질을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렌트의 자유는 주민자치의 본질과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오게 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진정한 자유는 남이 안 보는 고립된 장소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민자치 활동과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의 타자와의 말과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 관계에서 획득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소통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자유를 공공성과 동시에 강조하면서 자유를 정치 현상[정치적 자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는 주민자치와 같은 공적인 일들에 대한 주민들의 참여와 그 참여 안에서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과정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의 자유를 논하기 전에 자유 개념에 관해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이사야 벌린(Berlin)의 자유 개념을 간략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벌린의 두 가지 자유,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다.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표지. 사진=아카넷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표지. 사진=아카넷

 

영화 속 소극적 자유

널리 알려진 대로 벌린은 소극적 자유를 옹호하고 적극적 자유를 비판한다. 소극적 자유는 한 마디로 간섭의 부재(不在)”를 말한다. 간섭받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탈출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짜릿한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무고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와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옥 탈출 영화의 고전은 뭐니 뭐니해도 <빠삐용>이다. 우연찮게 보게 된 그 영화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빠삐용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개봉된 영화, 스티븐 킹의 <쇼생크 탈출>은 또 어떤가?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되어 기를 쓰고 탈출을 시도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가 감행하는 감옥 탈출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어쩌면 탈출 스토리를 대하면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일상의 굴레에서 아주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해방되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극적 자유는 타인이나 공적 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 해방되는 데 있다. 각자가 누릴 수 있는 행동의 자유로운 범위를 유지하고 그 범위를 축소하거나 침해하는 모든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벌린은 어떤 사람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폐쇄하고 단 하나의 문만 열어두는 행위는 그 열린 문으로 나타난 길이 아무리 좋고 또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적극적 자유는 자기 지배(self-mastery)’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소극적 자유가 소극적으로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적극적 자유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행위 결정의 주인이 되는 자유, 타자에 의해 자신의 삶이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두 개념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을 수 있지만 벌린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 지배라는 적극적 자유가 자칫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지배진정한 자기에 의한 지배로 해석함으로써 그 진정한 자기를 현실적인 자기의 외부에 정해둘 때 발생하는 위험이다. ‘진정한 자기가 국가, 계급, 국민 혹은 역사의 그 자체라는 초개인적 실체와 동일시될 때 그러한 초개인적 실체의 의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사이토. 자유란 무엇인가. p.68). 실제로 20세기 초의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소련, 일본의 전체주의 체제하에서의 철저한 자유의 봉쇄는 이런 논리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한나 아렌트 평전 표지. 사진=혜다
한나 아렌트 평전 표지. 사진=혜다

 

아렌트, 참된 자유는 이것이다

그렇다면 아렌트의 자유는 무엇인가? 아렌트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렌트는 벌린과 마찬가지로 가치일원론을 철저히 배격하고 가치다원론을 옹호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 또한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의 자유를 옹호해야 하기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동일한 척도로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필자가 주민자치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아렌트의 독창적인자유론이다. 그의 자유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참된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마치 꽁꽁 얼어붙은 사유의 강물을 깨부수는 카프카의 도끼처럼 우리의 고착화된 자유 개념을 해체시키고 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참된 자유란 한 마디로 나 홀로가 아닌 남과의 관계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이나 간섭을 피해 방콕하거나 세상과 연()을 끊고 산사에 파묻혀 있거나 자연인으로 산다고 해서 자유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외부의 간섭이 없거나 나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해방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어디론가 떠나고픈 충동이 드는 것도 그 이유일지 모른다. 아렌트는 역시 이러한 자유를 향한 느낌이나 충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외부 간섭의 부재나 타자와의 교섭을 회피하는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의 조건 중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타인은 나의 실존을 방해하는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사유는 차치하고서라도 남들과의 만남이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인 일상에서 아렌트의 말은 선뜻 수긍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며 남들과의 접촉 그 자체를 회피하려는 태도까지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렌트의 자유는 이 프라이버시란 말의 철학적 분석에서 출발한다.

 

원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 타인과의 객관적관계의 박탈, 삶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한길사 2023, p.142).

 

아렌트의 말대로 사적’(private)이란 말과 같은 맥락의 프라이버시(privacy)란 말은 박탈당한’, ‘뺏긴이란 뜻의 라틴어 형용사 프리바투스(privatus)에서 기인한다. 무엇이 박탈당한것인가? 아렌트는 타자의 존재라고 말한다. 사적인 삶에서 박탈된 것은 바로 타자의 존재라는 것이다.

타자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일까?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는 바로 이 질문의 답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는 앞서 인용한 대로 타인과의 관계의 박탈을 곧 삶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타인과의 관계를 갖는 것은 단지 내 멋대로 먹고사는 일상을 뛰어넘어 인간만의 그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 바로 아렌트가 말하는 진정한 (정치적) ‘자유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자유는 타인과의 만남의 장소[공공적 공간, 공론장]에서의 행위의견을 교환하고 그에 대해 응답을 받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다. 공론 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대해 남으로부터 응답을 받으면서, 즉 나는 타자와 대면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고 타자는 나와 대면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행위와 의견교환이란 타자와의 만남과 교섭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렌트에 의하면 한 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자유는 주민자치와 같은 공동체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주민자치 활동과 같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주민 혹은 타인과의 교류 혹은 소통을 통해 공동의 일들에 관해 함께 논의하고 실행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이다(아렌트, 서유경 역. 과거와 미래 사이2005, 한길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표지. 사진=한길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표지. 사진=한길사

 

무엇아닌 누구의 주민공동체를 향해

문제는 공동체라고 해서 모두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는 만남의 장소는 아니라는 데 있다. 주민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주민자치란 공동체에 요구되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표상의 공간이 아닌 현상의 공간’(이하 사이토, 윤대석 외. 민주적 공공성2020. 이음, pp.60-61)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이란 내가 타자와 대면해서 나타나고 타자가 나와 대면해서 나타나는 공간이다. 내가 다른 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유가 실현되고 내가 나타나는현상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떠나 모두가 평등하게 교류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아렌트는 이것을 누구’(who)무엇’(what)의 구분을 통해 설명한다.

무엇은 주민 개개인의 정체성이 남성이나 여성,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을 기준으로 구분되고 평가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주민을 사회구조 내의 지위[위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경우 그 주민의 정체성은 타인과 공유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위치와 동일한 다른 사람들과 언제든 교환이 가능한(공약 가능한) 유적(類的) 존재로 환원된다.

이렇게 주민 각자가 무엇으로서 인식 평가될 때 그러한 주민자치의 공간은 현상의 공간아닌 표상의 공간이 된다. 주민들이 서로를 무엇이라는 위상으로 환원시키는 한, 표상의 시선으로 보는 한, 주민 각자는 다른 주민들 앞에 하나의 고유한 실존적 존재로서 나타나는것이 불가능해진다.

아렌트의 논거에 의하면, 주민자치와 같은 공공적 공간은 주민 각자가 무엇이 아닌 누구인가를 근원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의미 깊은 현상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누구라고 하는 주민의 정체성은 그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나 말을 통해 나타나는것이다. 다시 말해 그 주민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그의 인격은 그의 성별이나 직업, 외모, 특성, 재능, 능력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오로지 그가 말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자유론이 과연 지금의 주민자치는 물론 한국 사회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무엇이 아닌 누구의 주민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표상의 공간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우리는 늘 그런 방식으로 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이며 필자 역시 동의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 혹은 주민자치의 현실은 현상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타자를 유용성 여부나 어떤 필요의 유무로 판단하는 경향이 지배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정한 대학출신, 특정한 직업으로 한 개인이 누구인지의 정체성을 결정해버리는 노예적 인식과 사고가 지배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타자로서의 주민을 다른 조건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를 미리 결정해버리지 않는(-결정의 위상에 두는) 태도, 그 결과 그 주민이 무엇을 말하고 행위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것으로의 인식의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둔감한 학()을 하는 자의 환상일 수 있다.

아렌트도 지적했지만(<인간의 조건> p.120), 요즈음 사생활(privacy)’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박탈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생활을 앞세워 자신을 타자로부터 분리하여 가능한 남들과의 교섭 그 자체를 회피하려는 태도가 일반적이 아닌가. 이런 세태에 아파트 신입주민 환영회와 같은 만남과 공론장의 창출을 통해 실질적인 주민자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도전 역시 환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두 매우 가치 있는 환상이다. 니버의 말을 인용하면 이런 환상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인간의 참된 자유를 실현시키는 공간으로서의 공동체, 주민자치는 결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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